우물에 빠진 달을 건져라. 두레박으로 건질 것인가. 손으로 건질 것인가. 자 빨리 건져내라.
우물에 빠진 달을 어떻게 건질 것인가. 눈에 보이건만 건질 방법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두레박으로 건진 달은 달이 아니다. 손으로 건진 달도 달이 아니다.
가짜다. 왜? 그림자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체만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림자는 그림자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림자 없는 달은 달이 아니다. 난감하다. 어렵다. 그렇다면 우물에 빠진 달을 건지는 것은 잠시 나두고 코르테스와 레이 크록을 만나보자.
500명대 50만 명과의 싸움. 누가 보아도 이것은 미친 짓 일 뿐이다. 코르테스 역시 그런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꿈에 그리던 황금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 생각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50만 명을 제압하지 않고는 황금을 비롯한 온갖 보석을 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상대할 그들이 포로들의 살을 먹고 가죽을 벗기는 호전적인 무리들이라는 전언(傳言)에도 코르테스가 결코 주눅 들지 않은 것도 또한 사실이었다.
1519년 7월 30일. 선원 하나가 선원들의 반란음모를 고해바쳤다. 코르테스는 이번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임을 직감했다. 곧바로 음모자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10척의 함선에 구멍을 뚫어 항해불가상태로 만들었다.
이제 쿠바로 돌아갈 운송수단이 없어졌다. 무시무시한 인디언들 피해 쿠바로 돌아가자고 선동하는 반대자들도 사라졌다. 코르테스는 일장 연설을 했다.
“쿠바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아스텍을 정복하고 멕시코의 지배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원하던 황금을 갖고 쿠바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배수진을 쳤다. 선원들의 불평불만이 사라졌다. 자신들이 처한 위험성을 직감하고 코르테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2년간에 걸친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이 시작된 것이다.
스페인에게는 영광일지 모르지만 아즈텍 원주민들의 멸망을 재촉한 전쟁은 코르테스 단 한명의 야심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도덕적 비난은 제켜두고, 코르테스의 결단력과 극적감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레이 크록의 결단도 드라마틱하다. 평생을 일개 외판원으로 생활했던 레이 크록이 어떻게 해서 맥도널드를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만들었을까. 더구나 그가 맥도널드 식당을 발견하고, 이를 프랜차이즈화 하려 했을 때 나이는 무려 53살이었다. 그 정도의 나이는 은퇴하는 것 외에는 달리 생각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1950년대였다. 그는 주변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웃기지도 않을 일을 벌였다. 그게 쉬운 일인가. 자본도 인맥도 없던 그는 곧바로 경쟁사에 밀렸다. 당시 레이 크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맥도널드에서 실패하면 갈 곳이 없다.”
배수진이었다. 단순히 말해서 맥도널드에 올 인한 것이다. 레이 크록의 성공비법은 단순한 한마디 올인에 달려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결단이 성공의 비결이다. 위대한 성공 뒤에는 항상 어떤 결정이 자리 잡고 있다. 결정이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내리는 결정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패자의 결정은 안전한 반면 승자들의 결정은 불안전하다. 패자들은 완벽하지만 승자들의 결정은 미비해 보인다. 왜 이게 문제인가.
패자들은 완벽을 원한다. 안전한 결정을 요구한다. 다양한 가능성을 예견하고, 여러 가지 변화 조건을 점검한 끝에 나오는 것이 올바른 결정이라고 믿는다. 시간은 그리 중요치 않다며,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는 것도 패자들의 작태이다.
분명한 것은 승자들은 그런 결정을 즐겨하지 않는다. 패자들이 봤을 때는 결정이라기보다는 무모한 결단일 수 있다. 그렇다. 신속하게 직관에 입각, 결정을 내리는 것이 허다하다. 행동이 먼저이고, 생각은 나중이다. 좀처럼 머뭇거리는 법이 없다. 따라서 그들의 결정은 위험해 보인다. 아니 위험하다.
성공하려면 이것을 이해해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패자들은 안전을 꿈꾸고, 승자들은 위험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패자들은 일상을 원하고, 승자들은 긴박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새삼 강조하지만 승자의 3가지 요소는 그릇(운)과 판단력, 그리고 결단이다. 이중 승자와 패자를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 것은 마지막 요소는 결단이다. 어떠한 결단을 했는지에 따라 승자도 지속적 승자와 일시적 승자로 나뉘어 진다. 성공은 결단의 연속이다. 앞서 언급한 코르테스, 레이 크록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적 승자들은 극적인 결단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들의 결단은 왜 극적일까. 한마디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을 초월한다. 최후를 담보로 한 그들 앞에서는 죽음과 삶이 다를게 없다. 중국 한나라의 개국공신 한신의 고사에서 나오는 배수진에서 보듯 이는 승자의 미덕이다. 배수진은 올인이다. 올인은 모든 것을 던진다는 뜻이다. 전체가 하나가 되어 몰입하는 성질은 배수진이나 올인이나 마찬가지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올인은 노름용어다. 그러나 올인을 하는 노름꾼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간단하다. 마지못해 모든 것을 던지는 게 첫 번째 이유이다. 자포자기 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올인도 자율이냐, 타율이냐가 중요하다. 의도하지 않은 올인은 자멸뿐이다. 모든 일은 주도적이어야 한다. 자신이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고 행동해야 한다. 그게 존재로서 사는 진정한 모습이다. 노예로서 사는 삶이 아닌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이다.
노름꾼의 올인이 승부로 연결되기 힘든 두 번째 이유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베팅을 하는 노름꾼의 몸과 마음, 공간과 시간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공포에 질려, 아니면 오만가지 생각으로 나뉘어져 있다. 승리의 여신은 얼굴을 찡그리며 외면하지 않을 수 없다. 여신은 당당한, 그리고 하나가 된 존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성공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먼저 하나가 되라. 마음이 하나가 되라. 두 가지, 세 가지, 네가지 이상 생각을 하지마라. 여러 가지 생각은 당신의 에너지를 빼앗아 간다. 선택 앞에서 망설이는 당신은 벌써 패배자이다. 선택은 당신의 에너지를 빼앗아간다. 선택의 가능성이 많을수록 당신의 에너지는 더욱 소비된다. 선택하는 가능성과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에 당신의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마음이 하나가 된 다음에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라. 몸 따로 마음 따로 놀지 마라. 분리는 패배자의 전유물이다. 분리는 에너지를 앗아가는 주범이다.
당신은 하나이다. 하나인 당신은 전력을 쏟을 수 있다. 모든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있다. 일과 당신을 하나로 집중시켜라. 오직 하나이다. 당신의 주변과도 당신을 하나로 만들어라. 오직 하나이어야 한다.
시간을 잡아라. 매순간을 하나같이 살아라. ‘하나인 삶’은 마지막 순간을 사는 것이다. 매양 마지막처럼 살아야 한다. 물리적 시간은 흐르지만 당신에게는 정지됐다. 매양 같은 시간이 당신과 함께 호흡한다. 매순간 하나가 되라.
당신은 하나이다. 당신을 둘러싼 주변과도 하나이고, 시간과도 하나이다. 이제 당신은 몰입이 됐다. 몰입이 바로 승자의 비결이다.
자신의 행위 속으로 몰입해야 한다. 완전히 몰입돼야 한다. 분리돼서는 안 된다. 분리는 패자의 위안일 따름이다. 무슨 일을 하던 몰입해야한다. 그게 사업, 공부, 연구, 사랑, 연기이든 간에 관계없이 몰입이 되어야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연기를 잘한다고 한다. 연기를 잘하는 연기자는 극중 인물과 하나가 된다. 하나는 몰입을 의미한다. 분리된 연기자의 연기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몰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중 인물과 하나 될 때 현실감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현실감은 관중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연기자는 위대한 배우의 반열에 오른다.
몰입은 위대한 승자, 역사적 승자의 존재 이유이다. 하나가 된 위대한 승자를 두서 없이 불러보자. 예수, 부처, 공자, 보리달마, 이사도라 던킨, 윤동주, 소크라테스, 도스토예프스키, 아인슈타인….
몰입의 중요성은 사업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힘을 잃은 기업들을 살펴보면 사업과 하나가 된 임직원을 결코 볼 수 없다. 회사 따로 조직원 따로 이다. 조직원들도 각자이다. 겉으로만 하나이고, 속으로는 전혀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 속과 겉이 판이하다. 속과 겉이 다른 조직은 발전 가능성이 없다. 수렁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다. 더구나 CEO마저 사업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끝장이다. 더 볼 것 없다.
패자는 허약하다. 몰입할 수도 없고 따라서 하나가 될 수도 없다. 그 역도 성립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일을 저질러 놓고 금방 후회한다. 분리된 상황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치 않는다는 것을 단지 아는 것에 그친다. 다시는 안 그렇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똑같은 함정에 계속 빠진다.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허약하다. 무능하다는 것이다. 10대의 허약함이 20대, 30대, 40대까지 계속 이어진다. 50이 넘은 그는 여전히 가망이 없다. 그리고는 단 한 번도 몰입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슬픈 삶이다.
패자들의 생각은 온갖 잡종사니다. 온갖 자질구레한 일까지 세세하게 다 따지고 든다. 이것은 이래서,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 망설이고 움츠려든다. 손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안전하다고 확신하지 않는다면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기회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기회를 놓친 그는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막차가 지나간 다음, ‘아참 더 이상 버스가 없구나’ 하는 식이다.
패자들의 허약함과 연관,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은 위험을 피한다는 것이다. 예외가 없다. 이는 치명적인 과실이다. 그들의 삶속에는 위험이 없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결정한다. 행동은 항상 나중이다.
승자는 위험하다. 긴박하게 산다. 긴박한 상황에서는 행동이 먼저이다.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 그들은 전사(戰士)들 같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언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 일단 행동한 다음 자신의 행동을 돌이킬 따름이다. 운과 배짱, 섬세한 수읽기가 끊임없이 시험되는 도박판에서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를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생각이 허용되지 않는다. 직감으로 판단하고 돌진하는 수밖에 없다.
전쟁터는 극단이다. 도박판도 극단이다. 올 오어 나씽(All or Nothing)이다.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 죽음 아니면 삶이다. 위험하다. 위험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매력적일수록 생각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생각은 정지한다. 모든 것이 멈춰 선다. 당신은 하나가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하나가 된다. 전부가 하나이고, 하나가 전부이다. 하나가 되어 돌진한다.
삶은 전쟁터, 도박판과도 별다를 게 없다. 비즈니스도 매한가지다.
전쟁이든 사업이든 승자들의 행동은 순간이다. 머뭇거릴 여유를 부리지 않는다.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거짓도 없다. 흉내도 없다. 그럴 시간조차 없다. 그들은 니체의 말대로 위험하게 산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은 심연 위에 걸쳐 놓은 밧줄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위험하며 그 위를 걷는 것도 위험하다. 뒤를 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벌벌 떨며 제자리에 서는 것도 위험하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은 초인에의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런 의지를 가진 자만이 위대한 인간이다. 또한 위험하게 사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만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변화를 무서워하고 그 자리에서 정체된 사람들을 도울수가 있다고 했다.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그대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을 간다. 몰래 그대의 뒤를 따르는 자는 그 누구도 없어야 한다. 그대의 발로써 그대가 걸어온 길을 지워버렸고, 그 길 위에는 불가능이라고 쓰여 있다.’
위험한 시기는 사람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다. 진정한 리더와 위대한 사기꾼의 갈림길은 위험이다. 위험에 처해 어떠한 행보를 보이는가. 위험을 포옹한 사람은 진정한 리더이다. 위험을 회피하는 사람은 유사한 리더, 그가 리더로 평가받았다면 위대한 사기꾼일 따름이다. 사기꾼 리더는 절대로 위험부담을 지지 않는다. 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그는 안전지대로 피한다. 주변에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만이 문제없다는 식이다.
리더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폭풍 속에서 배가 나아갈 속도와 방향을 명령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폭풍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폭풍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게 가장 큰 위험이라는 것을 안다. 위험을 감행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위험이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늘 해왔던 방식대로만 운행한다면 배가 침몰할 것임을 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키를 잡을 것이다.
폭풍이 분다고 배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면 파멸뿐이다. 성공은 불안전속에 있다. 안전 속에는 없다. 진정한 리더라면 이를 캐치하고 나갈 것이다.
안전 속에서 성공은 없다. 실패할 확률이 전혀 없는 성공은 없다. 위험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위험을 전혀 감수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가장 위험하다. 전혀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이 성공을 가능케 한다는 간단한 진리를 잃고 사는 게 패자들이다.
일상적인 삶 속에는 위험이 없다. 위험이 없으면 짜릿함이 없다. 권태롭기 짝이 없다. 진부하다. 일상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만 결코 감동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동을 위장한 가식적인 일만 벌어진다. 막상 감동적인 일에 접근하다가도 겁을 집어먹고 도망간다. 그들에게 감동적인 삶은 위험한 일이다. 위험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는 감동적인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들은 이론에만 밝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안다. 그러나 막상 경계에 이르면 행동과 생각이 달라진다. 두려움에 그들의 현란한 사고는 사라진다. 머리로만 사는 사람들이다. 마음 속,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없다. 강렬한 그 무엇이 없다. 그들의 삶은 가짜다. 그래서 추하다.
위험을 생활화해야 한다. 위험을 이기는 것도 생활화해야 한다. 반복은 습관을 형성한다. 위험하게 사는 것을 반복하면 습관화된다. 위험을 이기는 것도 습관화된다. 위험을 이겨내는 습관을 생활화하면 어떠한 두려움도 개의치 않는다. 위험을 이겨내는 사람은 반드시 형통한다. 크게 성공한다. 바로 영웅들의 삶이다.
위험하게 산다는 것은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마지막처럼 사는 것이다. 선택을 버리고 전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고, 몰입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승자의 결단이다. 성공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서두에 우물에 빠진 달을 얘기했다. 어떻게 잡을 것인가. 여기서 우물에 빠진 달은 성공이다. 달을 건지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이다. 당신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성공하려는 자는 스스로 건져야 한다.
눈에 보이지만 쉽게 건질 수 없다. 그러나 잡아야 한다. 잡되 그림자가 있는 달을 잡아라. 그림자가 없는 달에 더 이상 속지 마라. 속지 않는 것 자체만도 어려운 일이다. 건지는 것은 더욱 난감하다.
이럴 때 짜라투스트라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외줄 타듯 위험하게 살라’는 그를 보라. 위험한 그는 그림자와 달을 알고 있을 것이다.
http://news.mt.co.kr/mtview.php?no=2008122917430469881&vgb=column&columnType=&code=column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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